1/100000의 확률이 100000번 일어난다면, 당신은 견딜 수 있을까?
우연이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되는 시점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도망갈까, 아님 인정할까, 혹은 뛰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멜로/로맨스
한국
101분
2001.02.03 개봉
김대승 감독
이병헌(서인우), 이은주(인태희), 임현빈(여현수)
[국내] 15세 관람가
영화명은 익숙하나 감독은 익숙하지 않다. 제목도 알고, 이병헌과 이은주도 알지만 김대승은 모른다.
변영주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결국 배우 놀음이다. 그 배우의 그 장면으로 기억될 순 있어도 그 감독의 그 작품으로 기억되는 영화는 드물다."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수작이다. 나는 보통을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 감독의 필모를 따라가지만, 김대승 감독의 필모는 뭐가 없어서 못 따라갔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배우들의 끌어나가는 힘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 얼굴이 인상적일 수 있는 것은 각본과 감독의 합이 좋기 때문이다. 혹 각본가가 대단한 사람인가 싶어서 따로 찾아봤더니 '고은님'이라는 분이셨다. 필모를 보았다. 아...이분도 씁쓸하다...2001년 38회 대종상 영화제 시나리오상 수상을 끝으로, 즉 <번지점프를 하다>를 끝으로 딱히 없다.
가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역사에 남는 명작을 탄생시키는 것처럼, 일회성의 기적을 보여주는 분들이 있다. 잭 스나이더라던가..잭 스나이더같은 사람..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실을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실이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되는 기가막힌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상에, 그 하고 많은 나라들 중에서도 대한민국, 그 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연고등학교, 그 중에서도 2학년, 그걸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그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야."
인연, 인연하고 자주 말하지만 생각해보면 인연이란 게 참 어렵다. 충족해야 할 조건이란 게 너무 많다. 버릇도 닮아야 하고 감정도 닮아야 한다. 시대도 타고나야 하고 보폭도 비슷해야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알아봐야 해.
알아본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하지? 한 쪽만 인연이라고 느끼거나, 느낀 속도가 다르거나. 다르게 시작해서 똑같이 끝날 수도 있지만, 아예 시작을 못할 수도 있는데.
서인우의 비극은 인연을 알아보는 속도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국 둘은 알아보았으므로, 서인우와 임현빈의 홍실청실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수많은 확률을 뚫고 다시 만났다. 밀실이 떨어져 바늘 사이로 꿰인 듯.
"나 원래 첫눈에 반한다는 거 안 믿었었는데."
"나도 안 믿었어. 근데 이제는 알 것 같아.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우린 사랑하게 되겠구나, 느꼈어."
서인우의 일방적 지각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 임현빈과 서인우의 동감(同感)인 게 밝혀지는 순간, 그리고 그 감정은 17년 전 인태희와 서인우의 편린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 영화의 가치는 보다 나아간다.
세연 (世緣) [세ː연]
명사
세상의 온갖 인연. 또는 세상과의 인연.
-표준국어대사전
학교 이름에 불교의 연기설과 환생설을 결부시켜 놓았는데, 흥미롭다.
"내가 아무리 늦어도 기다려야 돼. 알았지?"
"걱정마. 나 어디 안 가. 여기 있을게. 이 모습 그대로."
인간관계의 뒤틀림은 어디서 시작될까. 대부분의 뒤틀림은 무엇인가가(내적인 감정이든 외적인 형상이든)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 섣불리 단정지을 때 일어나는 게 아닐까?
결국 둘은 17년후의 생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근데 사랑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풍덩 빠지는 게 아냐. 그 사람을 알아보는 거지."
정말 난 너무 아쉽다. 이 영화가 10년만 늦게 나왔어도 임현빈 역을 맡은 여현수 배우가 더욱 주목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병헌과 이은주 배우는 이미 당대의 스타여서 포스터에도 두 사람의 이름 뿐이지만 영화를 보고 각인된 건 여현수다.
배우로서 좋은 페이스를 가졌다. 더불어 영화의 결을 이해한 듯한 톤앤매너로 연기하고 있다. 소름이 돋을 혼신의 연기는 아니다.(그건 이병헌이 하고 있음)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관객은 임현빈 속에 인태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그 개연성에 여현수의 연기력이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여현수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았다. 아... 이분도 처참하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 맞는 배우 같다. 다시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로 뵙고 싶다.
"아 거기 사시는구나. 대성아파트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 사네!"
현빈이 너..아니 인태희...아니 현빈이 너... 잠깐 차에 타봐.. 이름도 어쩜 임현빈... 이 장면에서 이병헌 배우 표정 겁나 내 표정... 현빈 멋있어.. 사랑스럽다 진짜...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문학사상사·1987)
영화 속 수업시간에 낭독되어지는 여러 소설과 시, 구절들은 영화의 맥락과 닿아 있다. 그 중 하나는 강은교 시인의 우리가 물이 되어.
영화를 관통하는 시라고 생각한다. 배경처럼 깔리는 목소리들은 두 인물의 상태를 대변하기도 한다.
몇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대도, 결국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 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지녔기 때문이라죠.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을 사랑합니다
마지막 서인우의 독백이 사람을 감정적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좋은 결말. 해피엔딩인지 뭔지, 모르겠다. 번지점프를 했으나 추락하진 않은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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