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지 않은 편지 2

빛바랜 사진들은 나를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게 했고

지나는 행인들의 어깨 위에 복스러이 쏟아내 내리던 비가 멎었다. 비가 오니 괜스레 심신이 울적하여 며칠 전에 대청소를 하면서 차곡차곡 접어둔 편지랑 한쪽 구석에 쳐박아 놓았던 사진들을 끄집어내었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케케묵은 편지들과 빛바랜 사진들은 나를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게 했고 공허한 가슴을 그리움으로 물들게 했고, 보라빛 환상 속으로 나는 어느새 빠져들고 있었다. 해묵은 조그만 수첩을 펼쳐드니 여고시절의 내가 담겨져 있다.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페이지 아래에는 입시 며칠 전이다 라는 숫자와 함께 그리운 말 한 마디가 구석구석 채워져 있다. 어떤 페이지는 친구의 낙서로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간간이 선생님들의, 특히 젊고 미남인 총각 선생님의 나부랭이들이..

어색한 자세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코스모스를 주위로 네가 서 있다.

오늘 엄마가 드디어 떠났다. 혼자 남아있는 아버지의 처량함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떠나자고 말은 먼저 던져놓고 아버지만 쏘옥 빠지고 이모내외랑, 외삼촌 내외, 엄마는 떠났다. 겉으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지만 엄마는 못내 섭섭한 눈치다. "이번 기회 아니라도 앞으로 해외나들이 기회가 많으니깐 그 때 같이 가면 되지 뭐..."하고 엄마를 위로했다. 동생은 휴가 받아서 서울로 놀러가고 집안의 전체분위기가 생동감, 리듬감이 넘치는 평소의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적막감을 더해준다. 슬그머니 일기장을 넘겨서 한 귀퉁이에 꽂아둔 사전을 들쳐본다. 예의 그 어색한 자세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코스모스를 주위로 하고 네가 서 있다. 저녁에 네게 전화나 걸어볼까 생각하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