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지 않은 편지, 버리지 못한 봉투

어색한 자세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코스모스를 주위로 네가 서 있다.

김금령 2020. 10. 11. 00:16

 

오늘 엄마가 드디어 떠났다. 혼자 남아있는 아버지의 처량함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떠나자고 말은 먼저 던져놓고 아버지만 쏘옥 빠지고 이모내외랑, 외삼촌 내외, 엄마는 떠났다. 겉으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지만 엄마는 못내 섭섭한 눈치다. "이번 기회 아니라도 앞으로 해외나들이 기회가 많으니깐 그 때 같이 가면 되지 뭐..."하고 엄마를 위로했다. 동생은 휴가 받아서 서울로 놀러가고 집안의 전체분위기가 생동감, 리듬감이 넘치는 평소의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적막감을 더해준다. 슬그머니 일기장을 넘겨서 한 귀퉁이에 꽂아둔 사전을 들쳐본다. 예의 그 어색한 자세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코스모스를 주위로 하고 네가 서 있다. 

 

 

  저녁에 네게 전화나 걸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찍 오셔서 TV를 옆에 끼고 안방에 진득이 앉아있는 바람에 나의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아버지 앞에서는 내가 하고싶은 말을 제대로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사이가 비밀리 헤어져 있음으로써 더 보고싶은 사이가 될 것 같다. 사람은 역시 떨어져 봄으로써 상대방의 중요성의 크기나 소중함의 무게를 알게되는 것 같다. 일기장을 뒤적이면서 1월 8일의 나의 일기를 보았다. "나는 맹양에게 오늘 그는 떠났다고 얘길 했더니 기분이 어떠냐고 했다. 난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은데...했다."라고 적혀 있다. 

 

 

  근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야 너무너무 보고싶단 말이야.

 

 

  나 보고 싶지 않아?

  하루에 몇 번 내 생각 해?

  우리 언제 만나―아―?

 

 

   달력을 보니까 설에나 네 얼굴 보겠구나. 근데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지. 너를 만나면 할 얘기가 너무 많아. 나의 친구들 얘기에서부터 내 고민까지. 다행히도 나의 고민은 해결이 잘 되어서 다음에 너를 만나면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할 자신이 생겼어. 사실 처음에는 나만 알고 사알짝 넘어가려고 했었어.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아. 이번 일 때문에 오빠한테 잔소리 좀 듣고. 꾸중도 듣고. 너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사건이었어. 여기까지 해 두고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낫겠지.

 

 

  인천이란 곳, 어때? 쓸쓸한 도시로 느껴지겠지 아마. 너의 마음이 외로울 테니까 말야. 돈이 많이 들어서 전화 자주 하라는 말도 못하겠고 쉬는 날도 없겠지만 설령 있다 하더라도 오고 가고 9시간 정도 빼면 보는 시간도 짧을 테니까 자주 내려오라는 말도 못하겠고. 안전하면서도 경제적인 편지왕래가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

 

 

  아침에 눈 뜨면 회사출근하기 바쁘고 하루종일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자기 바쁘겠지. 그럴 때는 밥 먹는 것도 귀찮잖아 그치. 나의 하루는 화려한 나날들인데 너의 하루는 지옥같은 나날들이라고 하면 맞는지 모르겠다. 하루가 즐겁다고 생각하면 사는 것 자체가 생의 기쁨이고 하루가 지옥 같다고 하면 빨리 죽지 못하는 것이 분하겠지. 지겨운 날들이라고 생각하며 죽지 못해 한탄하는 것 보다는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즐겁게 활동하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