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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이청준 『벽』과『벌레 이야기』

실존주의니 뭐니 깊게 들어가면 내가 불리해짐... 말을 아낀다. 젠더 개념의 등장 이후 성을 XX/XY염색체로 나누는 방식은 구식이 되었다. 누구를 사랑하느냐, 나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가 곧 스스로의 성이다. 포괄 개념 자체가 서서히 정립되어 가는 중이니, 이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애꿎은 예시는 써먹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양분할 수 있을까? 오직 두 가지로 나눠지는 물질이 남아있단 말인가? 다행히 딱 하나는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완벽하게 양분할 수 있다. 삶은 죽음이 될 수 없고, 죽음은 삶이 될 수 없다. 때문에 그 사이의 줄타기는 어느 서스펜스보다도 더욱 카타르시스를 준다. 삶은 앞둔 죽음, 죽음을 앞둔 삶. 사르트르는 죽음을 앞둔 삶에..

2021.02.17

버지니아 울프와 오정희, 『유품』과 『꿈꾸는 새』

여느 문예지들의 칼럼에서 늘 박완서의 옆에는 오정희가 뒤따라 나오던 것이 기억난다. 그녀가 박완서와 함께 '여성작가'로 일컬어지는 특징들을 정립했다나 뭐라나. 『꿈꾸는 새』를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생각했다. 굳이 여성이라는 성별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의 문체는 각별하고 특별하다. 오정희의 소설은 글보다 회화에 가깝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꽃가루마저도 남김없이 모조리 묘사하는 그것은 타자기보다 붓터치의 느낌이다. 십원짜리 동전 열 개를 낱낱이 다시 세는 것으로 시작하여 탁하고 텁텁한 포도주를 병째 들고 질금거리며 끝나는 하나의 문단은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별것 아닌 묘사들이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풍경의 묘사만으로 풍경 앞에 서있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한다. 끝없는 권태감과 곧 죽어도 상관없..

2020.10.12

빛바랜 사진들은 나를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게 했고

지나는 행인들의 어깨 위에 복스러이 쏟아내 내리던 비가 멎었다. 비가 오니 괜스레 심신이 울적하여 며칠 전에 대청소를 하면서 차곡차곡 접어둔 편지랑 한쪽 구석에 쳐박아 놓았던 사진들을 끄집어내었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케케묵은 편지들과 빛바랜 사진들은 나를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게 했고 공허한 가슴을 그리움으로 물들게 했고, 보라빛 환상 속으로 나는 어느새 빠져들고 있었다. 해묵은 조그만 수첩을 펼쳐드니 여고시절의 내가 담겨져 있다.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페이지 아래에는 입시 며칠 전이다 라는 숫자와 함께 그리운 말 한 마디가 구석구석 채워져 있다. 어떤 페이지는 친구의 낙서로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간간이 선생님들의, 특히 젊고 미남인 총각 선생님의 나부랭이들이..

어색한 자세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코스모스를 주위로 네가 서 있다.

오늘 엄마가 드디어 떠났다. 혼자 남아있는 아버지의 처량함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떠나자고 말은 먼저 던져놓고 아버지만 쏘옥 빠지고 이모내외랑, 외삼촌 내외, 엄마는 떠났다. 겉으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지만 엄마는 못내 섭섭한 눈치다. "이번 기회 아니라도 앞으로 해외나들이 기회가 많으니깐 그 때 같이 가면 되지 뭐..."하고 엄마를 위로했다. 동생은 휴가 받아서 서울로 놀러가고 집안의 전체분위기가 생동감, 리듬감이 넘치는 평소의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적막감을 더해준다. 슬그머니 일기장을 넘겨서 한 귀퉁이에 꽂아둔 사전을 들쳐본다. 예의 그 어색한 자세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코스모스를 주위로 하고 네가 서 있다. 저녁에 네게 전화나 걸어볼까 생각하고 있었..

안녕. 오늘은 비.

비가 온다. 그래서 오는 길에 편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오늘은 수요일이거든. 금요일이 내가 사랑하는 무지무지 사랑하는 미경이 생일이거든. 무엇을 해주면 미경이가 제일 좋아할까? 네가 떠나는 날 너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날 맹이랑 새로운 애인이랑 와서 히히닥거리며 놀다갔어. 비가 오니까 네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맴돈다. 벗어날 수 없는 많은 애기들이 내 마음을 채우고 마음 속엔 많은 추억들이 무너지지 않는 성을 쌓고 있다. 비가 오면 모두가 쓸쓸한 모습을 등 뒤에 감추고 다니는 것 같다. 비가 오면 한 가지 안 좋은 게 있는데 땅이 질척질척하잖아. 그래서 내 마음이 축축해지는 것 같고 왠지 찝찝한 느낌이 들거든. 해가 가지는 분위기가 산뜻함이라면 비가 가지는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이런 축축한 모..

후지요시 마사하루, 『이토록 멋진 마을』(2016)

― ‘후쿠이’와 ‘도야마’라는 오래된 미래 ― 저출산, 고령화, 지역불균형, 인구불균형.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이것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그에 대한 담론이 이뤄지고 있었다. 매해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고 수정된다. 서울 외 지역 정치인들의 공략집에는 지역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10가지 방안이 실린다. 초등학생들은 백일장에 나가 출산 장려 포스터를 그리고, 신문에선 ‘출산율 역대 최저, 어린이집 폐업속출’이 헤드라인으로 찍혀 나온다. 문제점을 내포한 어휘들은 계속 만들어지지만 실질적 해결방안은 강구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무엇을 하라”고 말하진 않지만 “무엇을 보라”고 말하는 책이 한 권 있다. 후지요시 마사하루의 『이토록 멋진 마을』(201..

2020.10.10

번지 점프를 하다(2001)_사랑은 빠지는 게 아냐. 그냥 알아보는 거지

1/100000의 확률이 100000번 일어난다면, 당신은 견딜 수 있을까? 우연이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되는 시점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도망갈까, 아님 인정할까, 혹은 뛰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멜로/로맨스 한국 101분 2001.02.03 개봉 김대승 감독 이병헌(서인우), 이은주(인태희), 임현빈(여현수) [국내] 15세 관람가 영화명은 익숙하나 감독은 익숙하지 않다. 제목도 알고, 이병헌과 이은주도 알지만 김대승은 모른다. 변영주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결국 배우 놀음이다. 그 배우의 그 장면으로 기억될 순 있어도 그 감독의 그 작품으로 기억되는 영화는 드물다."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수작이다. 나는 보통을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 감독의 필모를 따라가지만, 김대승 감독의 ..

영화 2020.10.08

박태원과 제임스 조이스_구보씨와 애러비

EBS 수능특강 교재에 기출문제 자료로 늘 나오던 것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8)』이었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따위의 오지선다를 맞추기 위해 몇십번은 읽은 듯도 한데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목적 없이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일지도. 박태원은 1934년에 이 소설을 썼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을 시기이다. 더군다나 1930년대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주가 되던 때이다. 그러한 시기에 박태원이 구보씨를 외출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구보씨를 소요학파의 일원으로 보기엔 다소 염세적인 측면이 있다. 소설 중간중간 구보씨의 의식이 끼어 들어온다. 그가 하는 생각은 하릴없는 놈팡이가 할 법한 것들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었지만 가끔 뼈가 있는 말을 던질 땐 문장 하나 건너뛸 수 없었다. 동경엘..

2020.10.06

맥베스 (Macbeth, 2015)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고전 한 편을 읽었구나 생각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글자 그대로의 문학을.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그대로 차용한 영화이므로 희곡의 영상화에 가깝다. 무대장치가 밖으로 옮겨졌을 뿐 그 어느 각색도 거치지 않은 날 것의 셰익스피어이다. 비극이 두드러지는 건 그래서 일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다. 생경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생경한 이 영화가 감독만의 성취는 아닐 것이다. 원작가의 성취이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수많은 단어들은 직관적이지 않으므로 한 번에 파악되기 어렵다. 꼭 한 번은 돌려서 말한다. 그래서, 어렵고, 생경하여, 재밌다. "꺼져라 짧은 촛불아 인생이란 걷는 그림자뿐. 무대 위를 잠깐 우쭐대면 오가다 고스란히 잊히는 불쌍한 배우. 바보가 떠드는 허무맹랑한 ..

영화 2020.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