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문예지들의 칼럼에서 늘 박완서의 옆에는 오정희가 뒤따라 나오던 것이 기억난다. 그녀가 박완서와 함께 '여성작가'로 일컬어지는 특징들을 정립했다나 뭐라나. 『꿈꾸는 새』를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생각했다. 굳이 여성이라는 성별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의 문체는 각별하고 특별하다. 오정희의 소설은 글보다 회화에 가깝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꽃가루마저도 남김없이 모조리 묘사하는 그것은 타자기보다 붓터치의 느낌이다. 십원짜리 동전 열 개를 낱낱이 다시 세는 것으로 시작하여 탁하고 텁텁한 포도주를 병째 들고 질금거리며 끝나는 하나의 문단은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별것 아닌 묘사들이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풍경의 묘사만으로 풍경 앞에 서있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한다. 끝없는 권태감과 곧 죽어도 상관없는 삶.
동전, 피아노 소리, 수도꼭지, 햇빛이 뒤섞여 주인공의 케묵은 감정을 난도질할 때가 재밌었어요.
부끄럽게도 그녀의 훌륭한 소설을 나에겐 난도가 높다. 명사 하나에 대여섯 개의 수식어가 따라오고 -그리고-, -하며-, 로 우주문단이 되버린 문장의 끝에선 그래서 주어가 뭐였더라...... 하게 된다. 마치 칼 세이건 코스모스 읽을 때 그래서 인간이 뭐였더라...... 했던 것처럼. 짧지만 완독엔 시간이 걸렸던 단편소설이다.
진실의 환상에 대하여 또는 진실과 환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설 두 편을 소개하고 싶다. 두 작가님 모두 친절하게도 진실이란 단어를 직접 언급하시므로 내부적으로 두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진실에 달린 추의 무게가 확연히 달랐다.
버지니아 울프가 『유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 - 남성이 모르는(모른 척하는) 여성의 진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속단한 잘못된 진실. 연민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여전히 아주 어린애 같으며 솔직 그 자체였던 앤젤라는 길버트가 만들어낸 상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남성과 대등하게(또는 보다 훌륭하게)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그의 불같은 사랑에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며 자신의 일에 프라이드를 갖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비밀이 아주 많았지! 수십 권의 일기장이 이를 말해준다. 진실을 유품으로 남긴 채.
『꿈꾸는 새』에서 진실은 존재론과 관련된다. 삶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전혀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체하며 어떻게든 행복해지기 위해 아이를 다시금 들쳐업고 단단히 띠를 동여매 보지만 그런 일시적인 처방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우물 속에선 결국 퍼덕이며 날아오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는데. 나는 우물 속으로 툼벙 하며 떨어진 옥수수처럼 살아가지 않을까.
제목에 대하여. "새"를 수식하는 "꿈꾸는-"일 수도 있겠지만 "사이"의 준말 "새"일지도 모른다. 아 새슈탈트 붕괴현상이 일어난다......
큰따옴표가 없는 소설은 너무나 꿈같았고 그녀가 사실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드는 묘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르트르와 이청준 『벽』과『벌레 이야기』 (0) | 2021.02.17 |
---|---|
로맹가리와 이기호, 『지상의 주민들』과『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0) | 2020.10.18 |
후지요시 마사하루, 『이토록 멋진 마을』(2016) (0) | 2020.10.10 |
박태원과 제임스 조이스_구보씨와 애러비 (0) | 2020.10.06 |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0) | 2020.10.02 |